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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장면 연출 대사의 의미 연출 의도

by halfcentury 2025. 8. 16.

걸어도 걸어도 포스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2008년 개봉 이후 꾸준히 회자되는 일본 가족영화의 대표작입니다. 일본 가나가와현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가족 간에 쉽게 표현되지 않는 애정과 세월이 만들어낸 관계의 틈새를 섬세하게 그렸죠. 이 글에서는 영화 속 장면을 세밀하게 짚어가며, 감독이 어떤 의도를 담았는지, 그리고 그 장면들이 관객에게 어떤 정서를 남기는지를 깊이 해석합니다.

장면 연출

일본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사건의 빠른 전개보다 장면 그 자체의 미학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이 미학이 극대화됩니다. 카메라는 종종 고정된 시선으로 한 공간을 길게 비춥니다. 예를 들어, 부모 집 거실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인물들의 표정보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공간의 공기를 담아냅니다. 대사보다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는 일본영화가 전통적으로 중요시하는 ‘여백의 미’를 잘 보여줍니다. 여백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인물들이 말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또한,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불필요한 컷 전환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긴 호흡을 유지하여 시간의 흐름과 인물들의 관계 변화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이는 감독이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느리게 스며들도록 유도하는 의도의 반영입니다. 관객은 이 느림 속에서 인물의 숨소리와 시선의 방향까지 읽어내며, 이야기보다 ‘관계의 공기’를 느끼게 됩니다.

대사의 의미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일상 속 소품과 대사에 숨겨진 상징성에 있습니다. 부모와 아들이 함께 걷는 장면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관계를 좁히려는 노력과 그 실패를 반복하는 삶의 은유입니다. 집 안의 오래된 괘종시계는 세월의 무게를 상징하고, 빛바랜 가족사진은 잊히지 않는 기억과 함께 과거의 상처를 담고 있습니다. 마당 한쪽의 감나무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유대감을 은유합니다. 대사 역시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잘 먹었다” 같은 평범한 말 속에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미묘한 서운함이 겹겹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들에게 건네는 무심한 한마디는 따뜻함과 냉정함이 공존하는 일본식 가족 문화를 보여줍니다.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의사소통 방식인 ‘하라게’(腹芸)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라게란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읽는 문화적 습관을 뜻합니다. 이런 대사와 상징은 관객에게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전하며, 장면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여운을 줍니다.

연출 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걸어도 걸어도가 자신의 가족사에서 출발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를 ‘가족과의 화해’ 이야기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으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죠. 영화 전반의 톤은 따뜻하지만, 어딘가 씁쓸한 감정을 남깁니다. 이는 감독이 관객에게 “우리는 정말 서로를 이해하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입니다. 장면마다 등장하는 평범한 일상—식탁에 둘러앉아 나누는 대화, 마을 골목을 함께 걷는 발걸음, 여름날의 매미소리—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또한 감독은 비전문 배우와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어, 관객이 화면 속 인물을 배우가 아닌 ‘진짜 사람’처럼 느끼도록 만듭니다. 고레에다는 카메라를 인물에 바짝 붙이지 않고, 일정 거리를 둠으로써 관객이 관찰자가 되도록 합니다. 이 거리는 인물 간의 정서적 거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그의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가족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합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순한 가족영화의 범주를 넘어, 시간, 공간, 기억, 관계라는 보편적 주제를 품은 작품입니다. 장면마다 숨겨진 상징과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면, 영화는 훨씬 더 풍부하고 깊게 다가옵니다. 빠른 전개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처음엔 답답하게 느낄 수 있지만, 이 느림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무 말 없이 함께 걸었던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